[김경의 트렌드 vs 클래식]결혼식 없는 결혼

2013. 8. 8. 11:10좋은글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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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케이틀린 모란이라는 영국의 괴짜 여성 칼럼니스트가 쓴 책을 읽다가 공감 가는 이야기가 있어서 트위터에 올렸다.

‘여성 여러분, 결혼식은 우리 탓이다. 우리 때문에 곳곳에서 끔찍한 결혼식들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싼 비용을 치르고 자기 혼자만 유명인사가 된 양 행동하는 결혼식들은 광기의 절정에 도달한 마이클 잭슨을 떠올리게 합니다.’ -<진짜 여자가 되는 법> 중


그랬더니 트위터 친구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리트윗도 모자라 이런 답글이 올라온다. ‘끔찍한 결혼식. 갑자기 결혼식 없는 결혼을 이효리가 한다는 소식이 떠오르고. 사실이래요?’

‘라스베이거스에서는 결혼 당사자와 목사님만 있으면 혼인할 수 있다는데 역시 효리양은 앞서 나가 ㅎㅎ. 수백명 모아놓고 수천만원 들여 한 결혼도 몇 달 만에 끝장나곤 하는데 그게 다 족쇄죠 뭐. 파이팅입니다!’ 나도 결혼식 없는 결혼을 한 처지라 반가웠다.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그 생각대로 밀고 나가는 소수의 여자들을 우리가 서로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결혼식 따위에 쓸 돈이 없다 하면서 그냥 혼인 신고만 올렸습니다.” 최근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면서 나는 몇 번인가 그런 말을 했다. 결혼식에 대해서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일부러 그런 말을 했다. 그즈음 MBC 라디오 여자 진행자들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고 해서 일부러 그랬다.

‘여자는 크리스마스 케이크다. 24(세)에 가장 잘 팔리고, 25에도 그럭저럭 팔리지만, 26 이후에는 안 팔린다.’ 세상에, 아직도 자기 자신을 시장 가판대에 내놓은 싱싱하거나, 덜 싱싱한 생선 취급하는 여자들이 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걸 재밌는 농담이라고 시시덕거리는 방송국 여자들이 한심했다. 그때 생각했다. ‘그래서들 결혼식이라는 그 난리법석이라도 떨어야 그나마 위로가 되는 모양이군.’

하지만 생각해 보자. 그 위로가 얼마나 알량한지. 우리가 엄청나게 공허하게 성대한 그 결혼식을 치르기 위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비용을 쓰고 있는지. 국민권익위원회 발표에 따르면 2012년 기준 결혼식 평균 비용은 1722만원이라고 한다. 여기에 신혼집 마련, 예물, 예단, 혼수, 신혼여행 비용 등을 합하면 지출해야만 하는 돈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억대가 된다. 결국 빚을 낸다. 사랑에 빠졌고 비로소 제 짝을 찾았다고 믿고 있는 남과 여가 결혼해 인생의 제2막을 빚더미 위에서 시작한다는 얘기다.

나는 2500만원 상당의 베라왕 웨딩드레스를 입는 게 여자의 가장 큰 행복이며 영광인 듯 떠벌이는 잡지에서 무려 17년을 일했다. 그러면서 수도 없이 많은 초호화 결혼식을 봤다. 보통 특급호텔에서 열리는…. 솔직히 죄다 우스꽝스러웠다. 베라왕 웨딩드레스도 모자라 핑크색의 칵테일 드레스까지 입고 나타난 신부가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하객들의 테이블을 돌며 ‘오늘 하루 내가 여왕이다’ 하는 꼴들이 미안하지만 내 눈에는 너무도 촌스럽게 보였다. 불쌍한 어릿광대처럼 심지어 처량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이고, 일생의 단 하루 삐져나오는 군살 없이 저 따위 비현실적인 드레스를 매끈하게 입어내기 위해 당신이 얼마나 눈물겨운 노력을 했는지 나는 알고 있지. ‘생기 있는 얼굴’을 만들기 위해 고가의 피부 관리도 모자라 관장까지 했다지 아마….”

그래서 난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배에 잔뜩 힘을 주고 서서, 연신 어색한 미소를 입가에 경련이 일도록 머금은 채, ‘신부가 예쁜지 아닌지가 최대의 관심사’인, 그리고 ‘자기가 낸 축의금만큼 밥이 나왔는지 아닌지가 최후의 관심사’인 하객들 앞에 서 있어야 하는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렇게 했고 신혼여행조차 가지 않았다. 그 대신 우리는 시골에 약간의 땅을 샀다. 그 땅에 내가 벽돌을 날라다 주면 남편이 그림을 그리듯 지금 집을 짓고 있다. 내년 봄쯤 우리가 지은 집 주위에 어린 묘목들을 심을 거다. 그 나무들의 10년 후, 20년 후를 생각하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아름다운 보험을 들어 놓은 듯 든든하다. 말하자면 그 지속가능한 만족감과 가치를 위해 하룻밤 여왕이 되는 성가신 이벤트를 피한 셈이다.

내가 좋아하는 존 버거의 소설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존, 인생이라는 건 본질적으로 선을 긋는 문제이고, 선을 어디에 그을 것인지는 각자가 정해야 해. 다른 사람이 선을 대신 그어줄 수는 없어. 다른 사람이 정해 놓은 규칙을 지키는 것과 삶을 존중하는 건 같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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